발톱을 깎는다
푸른 먼지 그득한 기형도의 시집을 펼쳐놓고
한 두어 달 내버려둔 발톱을 깎는다
밤새 내리던 눈 그치고 햇살 더욱 눈부신 겨울 한낮
고단한 삶 잠시 접어두고
질긴 내 꿈 한 토막 툭툭 깎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무엇인가· · ·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 ·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 ·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 ·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 ·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 ·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 ·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 ·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 ·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 ·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 ·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 ·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 ·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 ·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 · ·한번 꽂히면· · · ·어떤 생각도· · ·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 · ·또 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 ·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시집은 너무 작다, 기형도의 하나 뿐인 시집은
발톱을 깎기엔 너무 작다, 나는 언제나
그처럼 아름답게 다음세상으로 떠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하루종일 잠만 자도
발톱은 자꾸 자라는데· · · ·
발톱을 깎는다
어두운 세상 한 귀퉁이에 쭈그려앉아
때 낀 내 삶 한 토막 툭툭 깎는다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가운데 '오후 4시의 희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