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내 날이 어둑하더니
하루종일 비가 온다
창문을 열어놓고 한참 밖을 내다보다가
아직 개지 않은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
강은교의 시집을 읽는다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아아, 한때 캄캄하던 나 아아, 한때 텅비어 있던 그대들ㆍㆍㆍㆍ어떨 때 나는 흐르는 물가에 살았다. 아침이면 웃으며 물이 나를 씻었고 밤이면 지는 해가 내 발을 따스히 덮어 주었다ㆍㆍㆍㆍ조금 컸을 때 나는 내 집을 떠났다. 아무것도 나를 씻어주지 않아서 점점 나는 더러워졌다ㆍㆍㆍㆍ오늘도 즐거운 하루였음ㆍㆍㆍㆍ한 노래는 가고 다음 노래가 온다. 한 저녁이 잠들어 다음 새벽이 일어 서듯ㆍㆍㆍㆍ그대 다녀간 뒤 부쩍 기쁨이 빨라졌다ㆍㆍㆍㆍ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ㆍㆍㆍㆍ사라져라ㆍㆍㆍㆍ바람처럼 갈 곳 없는 자 모두, 대낮처럼 사랑할 이 없는 자 모두, 사라져라, 결코 꿈없이 사라져라ㆍㆍㆍㆍ곧 별이 뜬다, 늙은 아버지인 우리
별ㆍㆍㆍㆍ오늘 저녁 누가 뒤꼍 꽃밭에 잠들어 맨드라미 붉은 이마에 흙살을 대고 있다ㆍㆍㆍㆍ어디냐 지금 막 너 가는 곳ㆍㆍㆍㆍ무덤에 꽃 일어서는 날ㆍㆍㆍㆍ옛날 아주 옛날 내 살던 곳에 빛 하나 소리 하나 기쁨 하나 살았네*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나무 냄새, 사람 냄새, 좋은 시는
좋은 시는 그 안에 음악이 흐르지, 좋은 시는
시인의 몸이 느껴지지, 그가 꿈꾸는 별이ㆍㆍㆍㆍ
시집을 덮고 일어나 담배 한 대를 문다
담배 한 개비 만큼의 평화라도 내겐 있었는지
아직도 비는 내리고, 나는
외딴 섬처럼 여기 별 한 모퉁이에 혼자 떠 있고
이런 날, 누구든 날 찾아오면
감춰둔 노래 하나 들려줄텐데


* 강은교 시집 <빈자일기>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