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 걸려 있던 노란 바바리코트 자락이
살짝 나부끼면서 금발 가발의
여인은 침대로 쓰러진다
여인의 새까만 안경알에
카펫에 웅크리고 앉아 텔레비전 보며 끊임없이 통조림을 먹어대는
사내의 옆모습이 열려진 냉장고 조명을 받는다*

새벽의 푸른빛이 창문에 번져올 때까지도
낡은 흰 구두를 벗어놓고
잠든 여인은 기척이 없다
처음 만난 여자,
처음 잠든 여자를 지나,
처음의 사내는 세면장에서 넥타이로
여인의 흰 구두를 닦는다

여인의 침대 밑에
흰 구두를 내려놓고
방문을 나서는 사내의 뒷모습이
세상 밖으로 처음으로 드러난 여인의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정규 방송이 끝난 시간
텔레비전에서는 흑백의 무수한
點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주전자 밑바닥에서 졸아붙는 물소리를 낸다
그 소리들 중 약 2퍼센트는 아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먼 우주에서 날아온 소리라고,
1999년 11월 어느 날
또 하나의 은하계를
처음 발견한 한국의 한 천문학자는 말했다

* 영화「중경삼림」의 첫번째 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