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벌판을 잇는 소멸,
골짜기를 잇는 생성,
무한정의 주검을 우리는 보았지.
주검은 놀랍게도
아름다움의 극치로 빛나고 있음을
당신과 나는 보았지.
이 세상의 일체는 주검이면서
그 순간 또한 생성이어라.
끝없는 주검의 모래, 모래, 모래.
당신과 나는 산더미 같은 모래성을 보고
아름답다고 했지.
그것들은 엄연한 주검,
엄청난 시체 더미였느나
공포는커녕
잡히지 않는 소멸의 신비,
귀신 같은 바람과 모래, 모래.
모래를 보면서
당신은 미친 듯이 머리를 흩날렸고
나는 살갗에서 피어나는 모래, 모래.
모래를 보면서 환호했지.
그 주검 속에서 우리는 잠시 넋을 잃었지.
나는 당신의 얼굴을
당신은 나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첩첩 모래의 성을 끌어안았어라.
허나 네바다 주의 소멸 속에서
우리는 결코 우리의 얼굴을 찾을 수는 없었어라.

2
미국 대륙을 잇는 소멸,
미국 대륙을 잇는 생성,
당신과 나는 이 세상에서
한 이십 년쯤 더 살다가
아차 하는 바람결에 똘똘 말려
데굴데굴 굴러가는 뼈만 남은 풀숲,
그 따위 허깨비가 될 수는 없다고
우리는 잠시 말없는 말을 했지.
신명난 모래와 바람과 그리고 또 모래 속에서
당신과 나는 어느 사이 벌거숭이가 되었지.
우리는 이미 주검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지.
공포는커녕
우리는 우리 자신의 뼈,
한줌도 안 되는 당신의 머리털,
순식간에 모래알로 변하고 있는 나의 살갗,
다시 모래와 바람과 모래 사이에서
이름모를 미세한 풀, 꽃, 새 들을 발견했지.
여보, 나는 당신을 불러보았지.
그러나 역시 우리 부부는
한 이십 년쯤 후엔
동해바다 가까운 어느 골짜기쯤에서
나는 개울물이 되고
당신은 조약돌이 되어
끝없는 영원을 가자고,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소멸한 뒤
참으로 개울물이 될 수 있고
조약돌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래와 바람과 하늘 속에서
알몸이 된 채 입술을 깨물었어라.


*『서울 1992년 겨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