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저수지에 들이댄 양수기다
내 사랑은, 호스로 몰리는 진흙 범벅처럼
거품 들이켜는 소리가 몸 안을 돌아다닌다
흙탕물 사이사이 물고기도 달려나오는 여름 한낮
마른 내 가슴만 적시려는 치우친 욕망 때문에
목놓아 매미가 울고 볏잎이며 미루나무가 고개를 흔든다
양수기의 거친 숨소리가 저수지 바닥에
골골 도랑을 파놓는다

하지만 추억 어디를 펼쳐도
나 혼자 일을 저지른 적은 없다
두렁을 건너오는 들밥과
오이냉국 속 얼음 조각 때문에
구름도 서편으로 가고 있다
구름 한 조각도 저 혼자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버드나무로 날아가 발가락을 다듬는 저 된장잠자리도
들밥을 이고 오는 치맛자락 때문이다

장마가 와서 저수지가 넘쳐도
양수기를 떼내지 않을 것이다
주황색 호스만 물 위로 떠올랐다가
가물면 다시 제자리로 내려앉을 것이다
사랑은 더욱 지독해져서 네 품에서만
떴다 가라앉았다 할 것이다
너는 내 일생의 저수지고
나는 호스의 끝에 매달린 쇳덩어리, 돼지머리다

깡마른 내 약력은 이 저수지에서
마지막 물을 들이켤 것이다
우그렁 눈으로 푸른 들을 바라보는 저수지여
멧돼지 머리통처럼 나는 너에게 저돌적일 뿐이다
둑마다 콩포기 짙푸른 우리의 신혼방

저수지의 젖꼭지를 후벼 파는
멧돼지의 등허리 위로 한 떼의 숨가쁜 바람이 덮친다
너의 젖꽃판 옆으로 숨 막히게 자라는 잡풀들
때론 논에 고인 몇 모금의 물을
너에게 되돌려주고 싶을 때 있음을 아는가

- 이정록,『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