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즉시색 - 수덕사 일기 3
김형경 | 425  

비우고 비우고 비우려 해도
텅 빈 내 영혼은 더 비울게 없다
비어 있다는 사실조차 비워내라고
도감 스님은 염주 알을 굴리며 법의를 펄럭이며

사월은 화려하다 핑크에서 퍼플까지 사월에는
절망도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이 되고
저 산을 깎아 저수지를 만들거나
저수지에 사람을 빠뜨려 사랑을 만들거나
돌멩이를 들어 세상의 정수리를 내려치는 모든 일이
물귀신 같은 사월에는

그러나 노스님은 비우라고 한다 영산홍과
자목련을 가리키며 희고 통통한 손가락 끝에
날아와 앉는 나비를 보여준다
나비가 날아온 서방정토로 햇살이 기울고
지구조차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다

비우고 비우고 비우고 싶다

나비 한 마리가 이 땅의 질서라면
라일락 한 송이가 한 덩이 빵이라면
서방정토가 난지도나 강화도쯤이라면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울 수도 있지만

그 이치를 몰라서가 아니다 백이와 숙제처럼
고사리나 캐고 개자추처럼 개자추처럼 집 없는 뱀이 되어
용서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아직도 아귀의 신음소리 들리는 이 사월에
아직도 몽달귀신 되살아나는 이 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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