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으로 散行으로 /산행으로 산행으로
김형경 | 425  

이렇게 깊은 밤 잠에서 깨면
덕숭산 한 자락 베고 누운 나를 발견한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손에는 염주를 쥐고
지나온 길들이 단단하게 응축된 염주 알을 굴리며

그러나 길은 어디로도 닫혀 있다
덕숭산 허리를 베고 누워 비구니의 속살을 생각하고
비구니의 파계를 기대하는 나는
너는 이제 시를 쓰지 않는다지 우리가 만난 이십 대 초반
나는 너의 서정시에 감동했지 수정이 누나 수국
네가 일으켜 세웠던 어린 나무들
그러나 이제는 시를 쓰지 않는 이십 대 후반
너는 역사의 기둥서방이 되고 싶어 한다지
우리 민족과 사회를 상대로 연애질이나 하려 한다지

너는 내 바람벽癖을 진단하기도 했지 낭만적으로
그건 애정 결핍의 정서적 증후군이야
사일구와 오일륙 근처에서 태어난 우리는
계곡에 빠진 세대 사랑 따위야

오늘 나는 대웅전 마룻바닥에 이마를 박고
삼층 석탑을 맴맴 돌기도 하며 남북통일과 이 땅의 평화
내 이웃의 평등한 삶을 빌었지
기원만으로 길이 열리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산다는 것은,
산허리를 베고 잠들었다가 잠깐 깨어나 바라보는
들풀 같은 것 여름내 햇살에 단근질 된 까만 꽃씨
행운을 준다고 믿었던 네잎 클로버
무분별하게 사랑했던 개 돼지 돌멩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염주 알 뒤편으로 쉽게쉽게 물러나는
삶이라는 것은,
시멘트로 만든 거대한 바퀴
바퀴를 굴리며 바퀴에 짓눌리며 헐떡이는 내 모습
전생인 듯 이승인 듯 떠올라오고

가자, 가자 내 영혼의 어깨를 토닥이며 힘겹게 일어서면
허리에서 무릎관절에서 혹은 전생 어디쯤에서
업보의 먼지가 풀썩풀썩 인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또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이냥 이대로 냇물이 되어
덕숭산의 발등이나 씻어주고 지냈으면
이름    비밀번호    

10 가난한 사람들  459
9 山行으로 散行으로 /산행으로 산행으로  425
8 공즉시색 - 수덕사 일기 3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