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구경하러 내려와 보았습니다
이미 나의 자리가 아닌
이 이승의 자리,
이 이승의 자리에
이곳 창경궁으로 몰래
가을을 구경하러 내려와 보았습니다

쨍쨍한 햇빛 아래서
돌계단을 오르다가
옛사람들을 생각했으나
옛사람들은 너무나 아득히 멀어
생각이 가다 말고

빈혈 같은 어지러움에
비틀비틀 돌의자에 앉아
길게 숨을 몰아쉬고 있노라니

눈 앞에 낙엽들이
격전지에서 전사한 패잔병의 시체처럼
바람에 식어들 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엔 달랑달랑 가지 끝에 단풍들이
지상엔 잔디밭에 퇴색되어가는 낙엽들이
이승의 천지를 분주히 오가고
그 사이에 인간들이 아직 쫓기며 살고들 있었습니다

오늘은 인간들이 정한 일요일
텅빈 잔디밭을 이곳 저곳
새들이 가을을 몰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겨울이 되려니
닥쳐오는 이 이별을 어찌하리

오, 이승의 가을이여
이 따사로움이여
이 은혜로움이여
가을이 다 지면 떠나야 하려니

오늘은 가을을 구경하러 이 이승으로
몰래 다시 내려와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