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촛불
박정만 | 23  

제 목에 칼을 놓아 두견이 울고
제 피에 불을 질러 모란이 지면
사랑이여, 나는 한 자루의 촛불로 서서
불꽃처럼 찬란한 죽음을 기다린다.

눈을 들어 사위를 둘러보면
어둠도 縮이 나서 가벼이 흔들리고
천년의 세월도 한순간에 녹아들어
고요의 밀랍처럼 하얗게 굳어진다.

그런 다음 다시금 풀어진다.
풀어져서 심중에 남아 있는 한마디 말이
말 없는 넋두리가 되어
만 리 길 하룻밤도 아니 가서
끝없는 長江처럼 굽이굽이 범람한다.

그런 다음 다시금 굳어진다.
굳어져서 초례청에 마주 앉은 기러기같이
제 발길 나보다 앞질러 가서
먼 하늘의 다릿목에
눈부신 한 쌍의 무지개로 걸려 있다.

나는 마침내 타고 남은 촛불로 선다.
어른대는 수천의 돈등화*속으로
한바탕 사랑의 춤사위가 벌어지고
어지러운 그대 머리채에
혼불만이 푸르게 일렁이며 맴을 돈다.

이윽고 일순간의 적막이
한 세계를 가뭇없이 덮어 버린다.
타고 남은 한 줌의 재도 없이
밤은 밤으로 이어져서 끝이 없고
몸뚱이 없는 그림자만 제 흥에 겨워
아닌 밤 제 桘에 못질을 하고 있다.

* 돈등화: 촛불이나 등잔불의 심지 끝에 동그랗게 앉은 불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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