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좁은 계단
나희덕 | 89  

낡은 벽을 쪼개자
벽과 벽 사이로 아주 좁은 계단이 보인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 계단은
거대한 나선계단의 일부일까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감아오르는 덩굴식물처럼

붉은 벽, 쓰러진 나무 그림자
푸른 벽, 서 있는 나무 그림자

벽은 쪼개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균열로 내파된 것인지도 모른다
쓰러진 나무 그림자와 서 있는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누군가 놓고 간 사과 한 알,
계단을 오른 흔적을 사과로 남겨두는 사람도 있구나
그는 이 자리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어쩌면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는지 모른다
구원처럼
계단 위에서 굴러내린 사과일지도

생각이 멈춘 자리에서 계단도 잠시 숨을 고른다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일곱 계단 위에 다시 사과 한 알,
빛에 한결 가까워졌다
벽에 갇힌 나무 그림자들로부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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