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지나고
나희덕 | 221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를 보여줄 수 없지만
그가 없다는 것도 보여줄 수가 없군요

물이 증발한 종이 위에 희미한 얼룩

어둠이 등뼈에 불을 붙이고
등줄기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눅눅한 생각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벽을 어지럽히는 그을음
금이 간 거울
재채기처럼 쏟아지는 기억
수도꼭지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이제 밤이 길어지리라는 것을 알아요

어둠이 등뼈를 다 태울 때까지
낮도 밤도 없이 길고 긴 잠을 잘 수 있었으면

밤이 지나면
독수리가 간을 쪼러 다시 찾아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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