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또 다른 입구
나희덕 | 94  

오늘은 장미 한 송이를 걸어보았습니다
열세 개의 문을 통과했지요
꽤 은밀한 구석이 많은 꽃이더군요
한 잎 한 잎 지날 때마다
고통스러운 향기가 후욱 끼쳐왔습니다
마지막 남은 암술에는
노란 꽃가루들이 곡옥처럼 반짝였습니다
꽃가루 음절들이 만든 문장을
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해독되지 않는 침묵이
장미를 장미로 만드는 원천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장미 한 송이를 걷고 난 뒤에도
걷지 않은 길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손가락들은 흩어진 꽃잎을 만지며
장미의 또 다른 입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들어간 적 없는 방,
그러나 표정을 잃어버린 장미는
어떤 문도 불빛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꽃잎에서 저 꽃잎으로, 또 다른 꽃잎으로,
베인 손가락은 피를 흘리며 서성거릴 뿐이었습니다
장미가 남은 향기를 다 토해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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