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의 포도알들은
포도밭 주위의 온갖 生들을 끌어모아
자기를 익힌다

섬의 전부인 포도나무들은, 이를테면
지중해 레몬빛 바람과 작은 섬 언덕 위 하얀 집들의 정령,
노새 울음 아코디어 소리,
그리스 여인 안개처럼 느린 웃음 따위들을 빨아들여
포도알 내부의 달콤함으로 뒤바꿔놓은 것이다

살아 있음이란, 어쩌면
그리움의 이름으로 세상을 끌어들어
오후의 적요 속에서 푸르게 자기를 익혀가는 일

수만리 낯선 섬, 그 거대한 포도알의 내부를 걸으며 나는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 무수한 삶의 풍경들에 대해 생각한다
가령, 스무 살 이태원 불빛 속에서 만났던
검은 가죽잠바의 불량소녀라든가
어사카 골목 세 평 남짓한 선술집,
'아끼' 라는 살짝 덧니가 귀여웠던 아가씨

처녀들아, 향료 바른 맨발로 포도알의 묘지를 밟아다고
포도받의 끝없는 윤회,
나의 파열이 이미 몸 밖 세상의 취기이리니
내 마음 여전히 그 기억들의 유해를 빨아들이며
쓸쓸한 달콤함으로 자기를 익혀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