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할머니
박경리 | 282  

낡은 수박색 모본단 저고리 입고
긴긴밤 긴 담뱃대 물고
앉아 있던 친할머니

밥을 예쁘게 자시던 노인네는
장날이 되면 소금으로 양치질하고
얼굴은 수건으로 빡빡 닦고
얹은머리를 한 뒤
열다섯 새 고운 베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지게를 진 머슴새끼 앞세우며
출타하는 뒷모습이 훤칠했다

탐탐찮은 사람이 와서
할머니 안녕하십니까 하면
들은 척 만 척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저 그만그만한 사람이 인사를 하면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반가운 사람이 그새 편안했습니까
그러면 비로소
보일락 말락 미소 머금으며
"편코"
그 말 한마디로 끝이었다
말수가 적고 표정이 없는 노인이었다

추운 겨울
동네에 곡마단이 들어왔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구경을 갔었다
숯불 피운 화로도 하나 사고
방석도 사서 깔고
구경이 끝났을 때
할머니는 방석을 접어서 겨드랑에 끼고
유유히 천막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 그 방석은? 하니까
돈 주고 샀다
어린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화로는 어쩌구

그러니까 그때가…… 여름이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새터 차부에 갔다
통영서 생선을 싣고 진주에 가면
진주서는 과일 싣고 통영으로 오는 화물자동차
통영서는 유일한 화물자동차 차부였다
살림집이 딸려 있었다
월사금 낼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머닌 월사금 받아 오라고
곧잘 그곳으로 나를 내몰았다
일종의 핑계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부재중이었고
아버지와 혼인한 젊은 여자 기봉이네가
아이를 안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올곧잖은 눈으로 뮛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 온 게 아니라는 응수에
기봉이네는
동무들과 함께 차부 앞을 지나면서
나를 작은엄마라 했느냐 하며 따졌고
나는 악다구니를 했다
노발대발한 기봉이네는
내게 부채를 던졌고
그것이 내 얼굴을 치고 땅에 떨어졌다
그길로 나는 소리 내어 울면서
큰집으로 갔다
그년이 감히 누굴 때려!
할머니 일갈에 집안은 온통 난리가 났다
부산에 출장 갔다 온 아버지는
차부로 달려가서 기봉이네를 배질하고
양복장 서랍을 모조리 끄내어
마당에서 불을 질렀다고 했다
그 후
기봉이네는 깍듯이 내게 예절을 지켰다
할머니가 내 편을 들어준 것도
그때가 처음이며 마지막이었다

일본 땅을 방황했던 큰아버지와
왕방울 같은 눈과 변호사라는 별명의 큰어머니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하여 나는 집안의 장손녀였다
살림을 며느리에게 내어 주고
중풍으로 고생했던 할머니는
해방 직후 돌아가셨는데
팔십을 훨씬 넘긴 장수였다

당시 나는 서울에 있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며칠 후
큰집에 불이 났다고 했다
달려간 아버지가
엉겁결에 농짝 하나를 들어내었을 뿐
모든 것은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창원집 할매가
자기 살림 다 가져갔다
그렇게 말들 한다는 것이다
육이오사변으로 고향에 피난 간 나는
불길에서 건져 낸 농짝 하나
나비 장석의 귀목장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지금도 그 나비장 한 짝은 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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