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람을 만들던 선풍기가
그 수명을 다한 듯 합니다.
고장나지 않을 것 같던 물건이었는데....^^

그러고보니 요즘은 미니 선풍기를 들고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부채대신 선풍기라, ㅎㅎ
좋은... 세상이 되었네요.

시원한 한 주 되셨지요?



늙은 선풍기를 위하여 - 엄원태

고모님께서 한 십 년 쓰시다가
미국으로 이민 가시면서 물려주신 일제 산요 선풍기가
우리 집에 온 지도 벌써 이십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해마다 여름을 맞아 이 놈을 꺼낼 때마다
잘 늙어 죽은 우리 속초 처갓집의 진돗개 진희를 떠올리곤 합니다
새끼들 쑥쑥 잘 낳아 퍼뜨리며 한 이십 년 가까이 잘 늙어
웬만한 사람보다 속 깊던 진희의 무심한 듯 검고 깊은 시선을
떠올려 보게 되는군요

진희처럼 새끼들을 낳은 경험은 없지만
이젠 이놈도 생을 다해 가는 건지
철사로 된 얼굴에서 세월과 존재의 섭리랄까
일생이라는 것의 한 심연을
언뜻 드러내 보이기도 합니다

이젠 바로 일 번을 틀면 이놈이 고집을 피우는 건지
금세 돌아가지 않고 으으응 하고 신음소릴 냅니다
살살 다뤄 달라는 말을 하게 된 거라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목덜미의 꼭지를 뽑으면 목이 돌아가야 하는데
목 디스크가 걸렸는지 관절 더덕거리는 소리만 내면서
오십견이 온 내 목덜미며 어깨처럼 삐딱하거나
제멋대로 돌다 서다 하면서 저항의 몸짓을 보입니다

한 번씩 얼굴을 가린 철망을 훌러덩 벗어 버릴 때도 있어
마치 중국의 변검술처럼 우리 가족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비록 생명 없는 이놈의 물건이지만
이름 하나 붙여 줘야 하는 건 아닌지요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고 반성하시며
선풍기에서 불성을 보신 시인도 벌써 계시지만
이 놈의 선풍기가 바로 이제 그 지경에 이른 듯
나이 오십을 바라보도록 아직 철없는 제게
뭔가 한 소식을 가르쳐 주시려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