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읽은 글입니다.
제 이야기는 아니고...저도 라면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오늘도 좋은 하루되십시요.

=====================================================


“지겹지도 않니, 라면!”

친구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말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혼자 자취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나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라면. 친구들은 내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하기 때문에, 또 경제적인 이유로, 싸고 간편한 라면을 어쩔 수 없이 먹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굳이 설명해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일면 내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서 그냥 실없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은근히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었지만 그걸 신경 쓸 정도로 내 마음은 여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적한 가을, 군 입대를 몇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다지 친하다고 말할 수 없는 친구 녀석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보여준 놈의 행동은 그만큼 나를 참지 못하도록 화나게 했었다.

그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던 저녁이었다. 용산전자상가에 있는 작은 내 직장의 일과를 끝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어김없이 라면을 끓이고 있을 때였다. 친구 녀석이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단지 용돈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뒤엎고 나왔다는 투덜거림을 앞세우고...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났고, 영문을 몰라 하는 놈과 몸싸움을 벌렸다. 평소 완력이라면 병적으로 싫어하던 내가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 모른다. 어쩌면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가을비와 군 입대를 앞둔 내 마음의 착잡함이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감정을 역류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내 어머니는 무척이나 마음이 여린 분이셨고, 그 여린 마음만큼이나 몸이 약하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짓궂게도 나를 낳으시는 것이 힘들어서 병을 얻으셨다고, 그래서 너는 애물단지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그것이 농인지 진실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 눈이 무언가를 식별할 능력이 생겼을 때부터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계셨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 언제나 아랫목 침상에 누워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 삼남매를 아련히 바라보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우리 삼남매와 떨어져 동두천 어딘가 미군부대가 운영하는 휴양원에 장기 입원하신 것은, 내가 막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역시 나는 버스나 기차를 타면 심하게 멀미를 하는 체질이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세 시간 가까이 차를 차고 이동해야 하는 동두천은 너무도 먼 나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독한 멀미도 내가 가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은 이기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가 매일 조금씩 주는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한 달에 두 번 토요일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학교가 아닌 어머니를 향해서... 내가 어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가상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우선 가양동 집에서부터 기차가 있는 영등포까지, 거기서 기차를 타고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동두천 한 정거장 전인 덕정까지... 정상적으로 간다면 2시간 40분가량,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며 거리였다. 하지만 내 어리고 약한 몸뚱이로 견디기엔 너무도 고역스러운 시간이었다.
참을 수 없는 멀미, 식은땀과 현기증, 눈앞이 노래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쓰러질 지경이 되면 나는 중도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숨을 크게 고르고 정신을 추스른 후에야 다음 버스나 기차를 타기를 몇 번. 덕분에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덕정에 도착할 때면 항상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덕정에 도착했다고 해서 내 고달픈 여정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를 만나려면 덕정에서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30분가량 더 거슬러 올라 ‘턱거리’라는 야릇한 지명의 산골마을로 가야 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버스가 하루에 두 번, 오전 12시와 오후 6시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버스를 놓친 나는 괴물처럼 으쓱한 산길의 어둠을 반쯤은 울먹거리며, 속으로 어머니를 부르며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턱거리에 도착하면 밤 10시가 훌쩍 넘어 있기 예사였다.
그러나 휴양원 정문에서 간단한 확인 절차를 마치고 나면 이제 끝이었다.

곧 어머니를 만난다. 저곳에서 어머니가 걸어 나오실 거다.
들뜬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 한곳만을 뚫어져라 보는 사이, 꿈처럼 저 멀리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 촌에서 유일한 여관에 - 사실 여관이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초가였다. -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정말 내 세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멀미에 시달리느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이제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멍멍했던 정신은 거짓말처럼 또렷해지고, 음식 냄새조차 거부했던 뱃속은 왜 그렇게 꼬르륵거리며 아우성을 치는 것인가.

내가 처음 휴양원에 갔을 때, 어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혹시나 문을 열어둔 음식점이 있을까 하고 마을 주변을 온통 헤매고 다니셨다. 하지만 산골마을이 다 그렇듯 턱거리는 인가라고 고작 50호를 넘지 않은 촌이었으니, 그 시간에는 음식점은커녕 문을 연 구멍가게조차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 약하신 몸으로 굳이 나를 업어주시며 다시 여관으로 발길을 돌리셔야만 했다.

내가 라면을 좋아하게 된 것이 그때부터였다고 기억한다. 당시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골방에서 졸고 있던 여관 주인아저씨에게 먹거리가 있느냐고 물으셨고, 주인아저씨는 이거라도 괜찮겠냐면서 라면 두 봉지를 주셨다. 잠을 자기도 아까운 시간이었기에, 어머니 품에 안겨 바삭거리는 라면을 생으로 먹으면서, 나는 그야말로 참새처럼 오만가지 내 주변에 일어났던 일을 쉬지 않고 주절거렸고, 가끔 어머니 손길이 머릿결에 느껴질 때면 또다시 서울을 떠나 여기에 올 날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무정하게도 사라지는 라면만큼이나 빨리 새벽이 깨어나서 어린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지만... 그 뒤부터 주인아저씨는 한번도 빠짐없이 라면을 준비해 두셨던 것 같다. 너무나 고맙다.


영문도 모르고 나와 몸싸움을 벌였던 친구는 라면이 좋은 내 이유를 듣고 피식 웃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나는 친구가 돌아가기 무섭게 방문을 잠그고 한참 동안이나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나이 열셋.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철부지 아들의 곁을 떠나가신 내 어머니.
어머니, 저는 아직도 당신의 품, 메마른 살 내음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