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박경리 | 286  

고담 마니아였던 나의 친할머니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구두쇠였지만
조웅전, 대봉전,충렬전, 옥루몽, 숙영낭자전
웬만한 고담 책은
돈 아끼지 않고 사서 소장하고 있었다
글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니는
이따금
유식한 이웃의 곰보 아저씨 불러다 놓고
집안 식구들 모조리 방에 들라 하여
소위 낭독회를 열곤 했다.
책 읽는 소리는 낭량햇고 물흐르듯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리하여 밤은 깊어만 갔다

내 어머니도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고담 마니아였을 뿐만 아니라
책 내용을 줄줄 외는 녹음기였다
어느 여름날인가 지금도 생생한 기억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물맞이하러 가던 날
점심은 물론이고 참외며 수박
기타 음식을 바리바리 장만하여
마메다쿠시를 여러 대 불러서 타고 떠났다
어머니는 택시비도 내지 않았고
아무 준비 없이 나만 데리고 동행했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으로 모셔 간 셈이다

구성진 입담에다가 비상한 암기력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사교적 밑천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우러져도
노래 한 자리 할 줄 몰랐고
춤을 추며 신명 낼 줄도 몰랐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심지어 농담 한마디 못하는 숙맥이었다
아마 그러한 점을
조금은 내가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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