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중해, 나의 타이타닉
유하 | 766  

1
지중해의 바람은 달다
깊은 밤, 나는 텅 빈 갑판에 나와
시칠리아 섬 감귤나무 숲을 데리고
망망대해를 건너온 바람을 영접한다
내 몸을 실은 타이타닉의 휘황한 불빛,
만발한 벚꽃 같다
나는 뱃머리에 서서 검은 바다를 향해 외친다
나여, 이 세계의 건달이여
달빛은 문득 수천만 리 심해를 뚫어,
거울처럼 내가 떠나온 나라를 비춘다
그 비좁은 땅 위엔 끝내 고향을 뜨지 못할
30대 중반의 시실리안 사내가 웅크려 있다
거대한 타이타닉 호처럼 흐르는
어찌할 수 없었던 욕망과 허송세월
춥다, 눈앞엔 시간이란 이름의 빙산이 떠 있다

2
어제 터키의 한 허름한 시장 골목을 지날 때
당신은 저 큰 배에서 왔나요, 라고 묻던
장돌뱅이 사내가 떠오른다
슬프게 꿈벅이던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나는
배처럼 떠가는 세운상가를 보았다
청춘의 한 시절, 세운상가 카바이트 불빛 아래 조우했던
친구의 얼굴, 그로부터 내 의식은 영영 멈추었다
어느덧 나의 청계천은 흐르고 흘러
포도주 빛 지중해와 몸을 섞고
지난날의 내 몸은 종로 뒷골목 후미진 원형극장으로 향한다
연민의 통로란 이런 것인가
내가 사랑했던 변두리 극장의 시실리안들
내가 들이마셨던 청계천의 지중해
내가 읽었던 사춘기의 종로 2가, 최후의 폼페이
그 욕정의 볼케이노

3
갑판에서 누군가 아코디언을 켜고 있다
구름이 달을 가리고, 멜로디는 서글프다
만발한 이 불빛의 세상 끝엔 무엇이 있는가
이제 내 배는 빠르게 가라앉으리라
너무도 많은 걸 적재했으므로
나의 책들과 음악과 애인들,
수천 톤의 꿈과 카바이트 불빛 아래 멈추었던 내 이미지의 화석들
잘 가라, 내 청춘의 타이타닉이여
어리석은 나날들은 그 어리석음에 충실했기에
아름다웠도다, 내가 떠나온 땅에서
나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다만
낯선 이국의 바다 위에서
저 멀리 침몰하는 꿈의 적재물들을 보았을 뿐
잘 가라, 장미의 계절이여
아코디언 선율은 턱밑에 차오르고
나는 여기 지중해에 누워 야윈 늑대처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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